초여름 정원에서
앵도아씨 초롱밝히는 6월

  
동영상으로 보기

 



여름의 초입인 6월은 꽃이 귀한 시기로 사방은 온통 녹색 천지이다. 그래서인지 정원의 빨간 앵두나무와 돌틈에 흐드러지게 핀 초롱꽃이 돋보이는가 보다. 
필자의 연구실 수도가에는 8년생 두 그루의 앵두 나무가 이맘때면 녹색 잎새로 빨간 얼굴을 빼곰이 내민다.
콩알 만한 앵두는 앙증맞고 서정적이다. 앵두나무곁에 무리지어 피는 초롱꽃은 밤이면 창가의 불빛을 받아 초롱불을  밣힌 듯 훤하다.
초롱꽃 만큼 번식력이 강한 들꽃도 없다. 2년전에 지인으로부터 얻은 초롱꽃 한 화분이 지금은 수십 포기로 늘어나 밭을 이루고 있다.
초롱꽃은 초롱꽃, 금강초롱,섬초롱등으로 나뉘어지고 색깔도 다양한데 필자의 정원에 무리지어 피는 것은 섬초롱으로 키가 1m 정도로 크고 가지가 많아 하얀색의 초롱을 매단 듯 흐드러지게 핀다.

'풍령초(風鈴草). 자반풍령초(紫班風鈴草)' 라고도 부른다. '성실 · 기도  천사 ·충실 ·정의 ·소원 ·비애 감사' 등의 많은 꽃말을 가지고 있다. 하루 세 번 종을 치는것이 일생의 업인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 대신 전쟁에 나가서 부상을 입은 뒤 노인이 될 때까지 종을 쳐왔다. 마을사람들은 그 종소리에 맞추어 일상 생활을 해 나갔고 종을 치는 그를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씨 나쁜 원님이 부임하여 종소리가 시끄럽다고 못치게 하였다. 마지막 종을 치던 날 종치기 노인은 눈물 때문에 높은 종각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다음해 봄, 그의 무덤에서 종처럼 생긴 꽃이 피어났는데, 이것이 '초롱꽃' 이라 한다.

초롱꽃은 주로 관상용으로 가꾸는데, 부드러운 순과 잎을 나물로 먹거나 기름에 볶아서 먹기도 한다. 식물 전체와 뿌리에 향기가 나며 한방과 민간에서는 천식. 편도선염. 인후염 등에 다른 약재와 같이 처방하여 약으로 쓴다.

과일중에서 앵두만큼 색이 곱고 이쁜 열매도 없다.
'앵두같은 잎술" 같이 이쁜 것을 나타낼 때 "앵두같은 ~~"라고 표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앵두만큼 사람의 사랑을 받는 나무도 드물다. 옛부터 앵도는 시골 우물가, 돌담장가나 정원에 심어 그 꽃과 열매를 감상하여 왔다.
노랫말등에도 앵두가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유행가 "앵두나무 처녀"라고 할 수 있다.

"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메자루 나도 몰라 내 던지고
말만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싸았다네
석유등잔 사랑방에 동네 총각 맥 풀렸네 ..."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라 하였건만


김정애가 부른 대중가요 '앵두나무 처녀'는 그 시대상이 노랫말에 잘 녹아든 유행가(流行歌)이다.
6.25로 황페화된 시골 구석구석 초가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뼈빠지게 농사 지어도 보리가 익을 무렵이면 식량이 떨어져 보리가 고개 숙이기를 기다리며, 소나무 껍질이랑, 쑥으로 연명을 하던 그 시절에 앵두나무 우물가는 여인네들의 신세타령을 하기도하고, 외부 소식을 듣기도 하는 유일한 만남의 장소였다

당시 집집에는 부엌 한켠에 크다란 물두멍을 마련하여 물을 저장하여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는데 가득 채우는것이 힘든 노역이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서 신세타령을 하던 이뿐이와 금순이는 이른 새벽 물동이 호메자루 내 던지고 단봇짐을 싸, 말만들은 서울행 열차를 타고 만다.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다는 소식에 석유등잔 사랑방에서 새끼꼬던 동네 총각들도 맥이 풀린다.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라 하였건만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으니 복돌이도 삼용이도 단봇짐을 싸들고 서울행 열차를 탄다.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 갈 곳 못 되더라/ 샛빨간 그 입술에 웃음 파는 에레나야/ 헛고생 말고서 고향에 가
자/ 달래주는 복돌이에 이뿐이는 울었네"
이 노랫말이 그후 이들의 서울 삶을 설명하여주고 있다.

시골처녀가 멋모르고 서울로 상경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몸이 되어 갈팡질팡 헤매일 적에 고향에서 찾아온 총각의 따뜻하고 너그러운 설득에 시골처녀는 감격에 젖어 그 총각의 가슴에 안겨서 마냥 울었다.
이같은 시대상을 지금의 50대 후반이나 60대들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앵두하면 또한가지 새마을 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1960~70년대 방방곡곡에서는 길이 넓혀지고 초가집이 양철지붕으로, 재래 뒷간이 개량 변소로, 우물이 간이 상수도로 바뀌고 들에는 관정이 수없이 박히고 통일벼란 다수확 품종이 보급되면서 '보릿고개 '는 서서히 무녀져 내려 절대 빈곤에서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당시 농촌 아낙들이 물동이로 길어나르느라 시간 및 노동력 낭비가 많았던 우물이 상수도로 바뀌면서 동네 우물도 앵두나무도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2008.6.9 르포라이터 정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