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酒幕)은 예있는데 사공은 간곳이 없네.......

 낙동강 본류와 지류인 내성천(예천 쪽)과 금천(문경 쪽)이 합쳐지는 삼강리 낙동강가의 삼강주막(복원)


주막(酒幕)은 예있는데 사공은 간곳이 없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하여 천삼백리 영남의 산하를 구비구비 돌아  부산 앞바다로 흘러드는 영남인의 고향이요.
젖줄이다.
영남인들은 낙동강가에 취락을 이루고 살면서 물길로 막힌 이웃은 나룻배로 내왕 하였다.
지금은 낙동강 천삼백리 물길 중 삼강주막이 유일하지만, 1970년 새마을사업 이전 까지만 하여도 낙동강 목(項)에는 나룻터가 있어 민초들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 되었다.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을 예로 시부러 보자.
풍양면은 삼면이 낙동강에 둘러싸인 반도형 지형으로 대구쪽으로만 육로이고 상주, 문경, 예천쪽은 낙동강으로 막혀 나룻배를 타야만 했기에 어느 지역보다 나루터가 많았다.

 1970 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 풍양면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 나들목에는 언시뱃가, 강대비리, 말응나루 하풍나루, 삼강나루, 구담나루 등 크고 작은 여섯곳의 나루터에는 사공이 상주하고 간이 주막도 있었다. 당시 풍양 사람들은 상주, 점촌, 용궁의 오일장을 보기위해서는 나루를 건너야만 했었다. 이 곳 사람들은 장날이면 토종닭도 내다 팔고 고추도 내다 팔았다.

이중 가장 큰 나루는 삼강(三江)으로 천삼백리 물길 중 마지막인 삼강주막으로 널리 알리진 곳이다. 이 주막은 약 100여 년 전인 1900년 무렵 삼강리 나루터에 세워졌다.

마을 이름 그대로 세강이 합쳐지는 곳으로 낙동강 본류와 지류인 내성천(예천 쪽)과 금천(문경 쪽)이 합쳐진다.
삼강나루는 대구와 서울을 잇는 최단거리 내륙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서울로 가는 산물은 이곳으로 모여 들어 뱃사공, 보부상,  선비가 흥청되는 내륙 수로의 요충지로 허기진 배와 마음을 채워주던 곳이었다.
이때는 황소 몇 마리가 들어가는 큰 목선이 오갔다.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주변에는 주막이 네개나 있었다고 마을 어른들은 전한다.

"삼강 나루에서 묘곡 왔습니다." "어느 뱃가에서 왔는교?"

당시 나루터의 사공들은 보리와 벼 수확이 끝나면  마을마다 배삯으로 모곡(募穀)을 거두려 다녔다.  타지인은 사공에게 삯을 주어여만 배를 태워 주었다.

1970 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나루에는 하나둘씩 다리가 놓여지면서 소금배가 올라오지 않고, 사람을 건네다 주던 나룻배마저 없어져 사공도 사라지면서 나루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중 삼강주막 만이 2005년 가을까지 주막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주막을 지켜왔다.

낙동강천삼백리 물길에 마지막 남은 삼강주막은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커  메스컴에 회자되면서 이곳을 찾는 발길이 잦아져 경상북도 민속자료 134호 란 문화재로 인정받아 복원되면서  삼강주막(三江酒幕)의 팔자는 달라지게 되었다.
 
 사공숙소,보부상 숙소,주막집이 지난해(2008)에  옛 모습을 찾아 새로운 현대판 주모가 과객을 맞고있다.

복원전까지 삼강주막은 을씨년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90여 년의 세월의 무게에 지붕은 슬레트로 이어지고 흙벽은 낡아 장정 서 너명이 힘껏 밀면 곧 넘어 갈 듯한, 주인 잃은 삼강주막은 2년간 비워 두었다.
삼강주막하면  마지막 주모(酒母)였던 고 유옥연 할머니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다.
꽃다운 열아홉살부터 90세까지 70여 년간 이주막을 지켜왔던 유옥연(2005 가을 작고) 할머니의 흔적들을 복원시 그대로 두어 할머니는 가셨지만, 부엌과 다락에서 할머니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삼강리 주민 정수흠(73)씨는 이시대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하머니를 이렇게 회상했다.

“유옥연 할매는 주막에서 술을 팔았지만, 처신이 바르고 인심이 후했지, 그리고 할매는 글을 깨치지 못하여 외상 술은 부엌 흙벽에 할매만이 아는 암호로 금을 그었지” ......

지금도 주막 부엌에 들어가면 연기로 거을린 흙벽에는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술 장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짧게, 길게, 지운 금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한잔 외상술은 짧게, 한 주전자 외상술은 긴금으로 세로로 긋고, 외상 술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지웠다고 한다.

삼강대교가 뚫리던 2004년 4월,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던 할매가 주막 봉당 마루에 앉아 쓸쓸히 눈물 훔치는 모습을 봤다고  정수흠(73)씨는 전한다. 삼강대교가 주막을 막아 고립되고 말았다. 물론 통로는 있지만.....

다리가 놓여지면서 주막을 감돌며 시원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허리를, 다리가 동강 막아버리고, 도로가 높아지면서 마을과 담이 쌓여 인적도 끊겨, 주막을 찾는 사람도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말았으니 70년을 지킨 주모의 마음이 어떠했으랴 ! 짐작이 간다.
할매는 다리가 놓여진 다음해(2005년) 가을에 노환으로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마을주민 정수흠(73)씨는 삼강주막을 지키는 보호수인 회화나무가 영험한 나무라고 전한다.
옛날에 상주의 김씨성을 가진 목수가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면 사고도 나지 않고 큰 돈을 번다하여 연장을 가지고 이 나무를 베려하므로  마을사람들은 마을을 지키는 영험스러운 나무라 하여 베지 못하게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고 한다.
목수 김씨가 어느날 나무그늘이 좋아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만약 이 나무를 해치면 네가 먼저 죽으리라" 하므로 꿈에서 깨어나니 하도 생생하여 식은 땀을 흘리며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혼비백산 달아났다고 한다.


2009.4.13 글.사진   영남일보 즐거운디카여행 르포라이터丁海酉

 



 삼강재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하여 천삼백리 영남의 산하를 구비구비돌아  부산 앞바다로 흘러드는 영남인의 고향이요.젖줄이다.  영남인들은 낙동강가에 취락을 이루고 강으로 막힌 이웃은 나룻배로 내왕 하였다. 지금은 낙동강 천삼백리 물길중 삼강주막이 유일하지만, 1970년 새마을사업 전까지만하여도 낙동강 구비구비에는 나룻터가 있어 민초들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 되었다.

   삼강재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가의 삼강대교와 삼강주막 방향.

 

   삼강주막 마을 들머리

  삼강주막에 세워진 예천 관광 안내판

 

 에천군 풍양면은 삼면이 낙동강으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주변에는 나루터가 많았다.

 낙동강 천삼백리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 황지


   낙동가 천삼백리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의 생전 모습 . 꽃다운 열아홉살부터 90세까지 70여 년간 이주막을 지켜왔던 유옥연 할머니의 흔적들을 복원시 그대로 두어 할머니는 가셨지만, 부엌과 다락에서 할머니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지금도 주막 부엌에 들어가면 연기로 거을린 흙벽에는 유옥연 할머니의 외상술 장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짧게, 길게, 지운 금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한잔 외상술은 짧게, 한 주전자 외상술은 긴금으로 세로로 긋고, 외상 술값을 죄다 갚으면 옆으로 길게 금을 그어 지웠다고 한다.

   복원전까지 삼강주막은 을씨년슬었기  짝이 없었다. 90여 년의 세월의 무게에 지붕은 슬레트로 이어지고 흙벽은 낡아 장정 서너명이 힘껏 밀면 곧 넘어 갈 듯한, 주인 잃은 삼강주막은 2년간 비워 두었을 때의 삼강주막

   복원전까지 삼강주막은 을씨년슬었기  짝이 없었다. 90여 년의 세월의 무게에 지붕은 슬레트로 이어지고 흙벽은 낡아 장정 서너명이 힘껏 밀면 곧 넘어 갈 듯한, 주인 잃은 삼강주막은 2년간 비워 두었을 때의 삼강주막

   낙동가 천삼백리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의 생전 모습 . 꽃다운 열아홉살부터 90세까지 70여 년간 이주막을 지켜왔던 유옥연 할머니의 흔적들을 복원시 그대로 두어 할머니는 가셨지만, 부엌과 다락에서 할머니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2008년에 복원되어  옛 모습을 찾은 삼강주막

 2008년에 복원되어  옛 모습을 찾은 삼강주막 야외 쉼터

 2008년 가을에 복원된 사공, 보부상 숙소  

 삼강마을과 주막을 잇는 통로벽화

 삼강마을과 주막을 잇는 통로벽화

 복원된 삼강주막과 야외 쉼터

 삼강 주막 먹걸이. 해물파전. 묵, 두부

 예천 안내판

 옛 삼강나루터. 삼강나루는 대구와 서울을 잇는 최단거리 내륙 뱃길로,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소금배와 서울로 가는 산물은 이곳으로 모여들어 뱃사공, 보부상,  선비가 흥청되는 요충지였다. 이때는 황소 몇 마리가 들어가는 큰 목선이 오갔다.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으로 주변에는 주막이 네개나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