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르포   객주문학관

▲  경상북도 청송군이 국비 등 73억원을 들여 진보면 소재 폐교된 진보제일고 건물을 리모델링한 객주 문학관

▲  김주영 소설가
1939년 1월 26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 월전리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다. 1971년 '월간문학'에 '휴면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장편소설'객주(전9권)', '아들의 겨울',  '천둥소리',  '활빈도'(전5권)'외설춘향전',  '화척'(전5권),  '야정(전5권)',  '홍어',  '아라리 난장(전3권)',  '잘가요, 엄마',  소설집 '겨울새',  '새를 찾아서',  '김주영 중단편전집(전3권)'등이 있다.
1983년'외촌장 기행'으로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1984년 '객주'로 제1회 유주현문학상 수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수상.
1996년 '화척'으로 제8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8년 '홍어'로 제6회 대산문학상 수상.
2001년 '라리 난장'으로 제2회 무영문학상 수상.

 

 

 

▲  김주영이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안동엽연초생산조합의 주사직을 그만두겠다고 1968년 작성한 사직원
 

▲  객주문학관 2층 전시실에는 객주를 신문에 연재할 당시의 육필 노트가 펼쳐져 있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대학 노트 전면에 빽빽이 적혀 있다.

 

 

 

▲ 장사치와 서민을 주인공 삼은 한국 최초의 역사소설로 평가받는 대하소설 '객주'가 1~9권 출간 30년 만에 마지막 10권이
나오면서 완간되었다.
1979년 6월1일 서울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客主'는 1984년 2월29일까지 모두 1465회 연재되었으며 연재가 끝난 해 9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인 천봉삼을 원래 구상대로 죽게 하는 대신 살려둠으로써 여지를 남겨두었다.
결국 그로부터 30년 만에 연재를 재개했고 5개월간의 연재를 거쳐 마지막 완결판 10권을 내놓았다.

작가가 다시 필을 들게 된 것은  경북 울진군에 남아있는 옛 보부상 길이었다.

울진의 흥부장에서 봉화의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보부상 길이 예전 모양 그대로 보존돼 울진군에서 ‘금강소나무숲길’이란 명칭으로 일부 구간을 개방하고 있다.
울진군 북면 두천 1리는 조선 후기 보부상들이 울진의 온갖 해산물을 등에 지고 산을 넘어가던 출발점이었다.

조선시대 울진의 해산물을 경북 내륙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이곳이다.
울진과 경북 내륙인 봉화 춘양,안동 사이에는 백두대간이 가로 놓여 샘수골, 시치재, 말래, 샛재, 저진터, 빛내골로 이어지는 험로이다.

그 시절 보부상이 아니었으면 울진의 해산물과 봉화의 농산물이 거래될 수 없었다.
보부상은 짐을 진 채 울진에서 봉화까지 150리(약 58㎞) 산길을 3박4일간 걸어서 넘어다닌 그 길에는 민초들의  애환과 삶이 녹아 있다.

울진쪽 옛 보부상 길 입구인 두천리에는 1890년경 보부상 정한조와 권재만의 은공을 기린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라는 송덕비 두 개가 서 있다. 이것이 객주 10권을 구상하게 된 포인트가 되었다.

울진에는 보부상이 정착했던 터가 남아있다. 길 위의 보부상이 아니라 보부상의 정착기를 객주 10권의 테마로 삼았다.
객주 완결판 10권에는 1~9권까지 나왔던 인물 중에서 천봉삼과 월이만 등장할 뿐 소설속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새로운 얼굴들이다. 정한조와 권재만은 ‘울진 내성행상불망비’라는 보부상 송덕비에 이름이 나오는 실존 인물들이다.

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완결편 ‘객주 10권’ 은 이렇게 시작 된다. 
 <1> 멀고 먼 십이령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1> 멀고 먼 십이령

                                                                                      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섶다리 아래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울물 소리가 그윽하고 오묘했다. 그래서 호음교라 부르기도 하는 빛내골(小光里 혹은 召造院) 계곡 위를 가로지르는 행상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갑신년 2월 하순, 시절은 봄빛이라지만 아직은 여우도 눈물을 짜낼 만큼 맵고 짠 추위는 가실 줄 모른다.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벼랑을 정이나 자귀로 찍어 겨우 발 디딜 길을 낸 벼룻길(遷道) 역시 꽁꽁 얼어붙었고, 산기슭에 쌓인 눈도 녹지 않아 계곡을 가르는 여울물 소리 듣기는 이른 시절이었다. 눈밭 속으로 바라보이는 소나무둥치는 붓으로 찍어낸 듯 먹빛이었고, 방울나귀들이 벼룻길을 박차고 걸을 때마다, 눈의 무게로 휘어진 나뭇가지들에서 눈덩이들이 떨어져 벼랑 아래로 흩어졌다. 잎을 모두 떨궈 앙상한 활엽수 가지는 새벽바람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남쪽 산등성이에 남아 있는 잔설들을 바라보노라면, 흡사 은갈치떼가 산기슭을 따라 서 있는 소나무 가지들 사이를 요리조리 비켜가며 헤엄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겨울철에는 산속에 떨어진 열매나 갈잎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 산양떼가 협곡을 가로질러 계곡으로 내려와 눈 속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는데, 까마귀떼들은 눈 덮인 나뭇가지 사이를 요리조리 옮겨다니며 산양떼를 보고 지악스럽게 짖고 있었다.

일행은 밤마다 호랑이가 내려와 판자문을 긁는다는 빛내골 마방집에서 노루잠으로 눈을 붙이는 시늉만 하고 축시말(丑時末)에 일어나 채비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나귀들을 선머리에 세우고 발행한 지 한식경 남짓, 이마에 와닿을 듯 가파른 자드락길을 피가 짚신을 적시도록 걸음을 재촉하였다.

열서넛을 헤아리는 상단 일행들은 그래서 숨소리만 거칠 뿐 농을 건네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행은 신표를 지닌 부상들이 향도하고 있었지만, 짐바리를 장시까지 져다주고 삯전을 받는 차인꾼들도 섞여 있었다.

울진 해안에 흩어진 염전이나 흥부장에서 내륙의 현동 저잣거리를 거쳐 내성장시까지는 줄잡아 160여 리 상거에 내왕 행보에는 눅게 잡아도 8, 9일이 걸린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십이령 내왕길에는 관원들의 숙소인 원집도 여럿이었다. 일행의 숙소참이었던 그곳 빛내골 숫막거리는 십이령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속에 자리잡았다. 관원들이 묵는 원집이 있다지만, 일 년 열두 달에 도임하는 현령 일행이 한두 번 지나다닐 뿐 울적하리만큼 적막한 편이었고, 울진 포구 염전에서 현동과 내성장을 오가는 소금짐들과 고포 미역, 그리고 연안에서 거둔 염장품과 건어물 들이 열두 고개로 이름난 이 산협길을 분주하게 오갈 뿐이다. 십이령 고갯길 여기저기에는 샘수골, 시치재, 말래, 샛재, 저진터, 빛내골과 같은 숫막촌이 여럿이지만, 어느 숫막을 막론하고 해 질 녘에 찾아든 길손들에겐 끼니 값만 받을 뿐 봉놋방은 공짜로 내준다. 그래서 일행들 역시 숫막 울바자 곁에서 써늘하게 식은 새웅밥으로 겨우 허기만 모면하고 봉노에 끼어들어 노루잠으로 때운 것이었다.

외양은 잔망스러워 보잘것없었으나 걸음은 잽싼 네 필의 방울나귀 등에는 꽁꽁 묶어 잡도리한 시겟바리와 무명짐이 거북스럽도록 높이 실려 있다. 나귀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자지러지는 듯한 워낭 소리가 가파른 벼랑길 아래로 따뜻한 봄날 나비떼처럼 흩어졌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걸음을 재촉하고 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길은 예상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내장조차 얼려놓을 듯 사정없이 옥죄고 드는 된추위가 너무나 혹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상단 일행은 나귀들과 더불어 쉴 참도 두지 않고 걷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몰아치는 삭풍 속으로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갈개치는 눈발이 귓불을 할퀴고 볼따구니를 때릴 때마다 깊고 깊은 오한이 오장육부를 타고 핏속까지 파고들어 뼈마디를 얼어붙게 한다. 고개를 쇄골 깊숙이 박고 시선을 내리깔고 발걸음을 옮겨놓지만,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서럽고 매서운 설한풍은 막을 길이 없다. 갈 길은 여명 속에 희뿌옇게 깔려 이수(里數)조차 짐작하기 어려운데, 감발 속에 감춘 발은 언제부턴가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그런데 맨 뒤를 따르는 나귀 등에는 작은 부담농 하나만 달랑 얹혀 있다. 자세히 보니 그 나귀는 걸음을 옮겨놓을 때마다 절뚝거리고 있는 절음난 나귀였다. 등에 짐을 실은 채로 앞장 선 암놈 궁둥이에 올라타려 하다가 앞굽 하나를 돌덩이에 짓찧긴 모양인데, 아주 으스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트기 전에 서둘러 발행할 만큼 여정이 다급한데 나귀 한 마리가 굽통을 다쳐 일행 모두의 심기가 불편하다.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숨죽이고 부지런히 걷는다면, 성황사와 비석거리가 있는 샛재까지 산길 30여 리는 아침 선반머리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었다.

샛재 들머리에 들어서면 깊은 산속인데도 여름에는 자지러질 정도로 차갑고, 겨울에는 김이 무럭무럭 오를 정도로 뜨거운 샘이 있어, 고갯길을 넘나드는 상단들이 부담을 풀고 요기를 하거나 유숙하고 떠나기도 하였다.

 

 

 

 

 

 




객주 10권 소설의 무대
십이령 보부상길

대하소설 객주 10권에서 작가 김주영은 이렇게 십이령 보부상길을 썼다.

"울진 해안에 흩어진 염전이나 흥부장에서 내륙의 현동 저잣거리를 거쳐 내성장시까지는 줄잡아 160여 리 상거에 내왕 행보에는 눅게 잡아도 8, 9일이 걸린다.

북에서 남으로 뻗은 백두대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십이령 내왕길에는 관원들의 숙소인 원집도 여럿이었다.

일행의 숙소참이었던 그곳 빛내골 숫막거리는 십이령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속에 자리잡았다.

관원들이 묵는 원집이 있다지만, 일 년 열두 달에 도임하는 현령 일행이 한두 번 지나다닐 뿐 울적하리만큼 적막한 편이었고, 울진 포구 염전에서 현동과 내성장을 오가는 소금짐들과 고포 미역, 그리고 연안에서 거둔 염장품과 건어물 들이 열두 고개로 이름난 이 산협길을 분주하게 오갈 뿐이다.

십이령 고갯길 여기저기에는 샘수골, 시치재, 말래, 샛재, 저진터, 빛내골과 같은 숫막촌이 여럿이지만, 어느 숫막을 막론하고 해 질 녘에 찾아든 길손들에겐 끼니 값만 받을 뿐 봉놋방은 공짜로 내준다. 그래서 일행들 역시 숫막 울바자 곁에서 써늘하게 식은 새웅밥으로 겨우 허기만 모면하고 봉노에 끼어들어 노루잠으로 때운 것이었다."

소설에서와 같이 십이령 보부상길은 옛 보부상들이 동해안 울진의 흥부장, 울진장, 죽변장에서 소금, 미역, 염장품 등 해산물을 구입해 백두대간 바릿재와 샛재를 넘어 봉화와 영주, 안동 등 내륙지방으로 행상을 할 때 다니던 길로 산세가 아주 험하고 구간이 길어 내왕 행보에는 눅게 잡아도 8, 9일이 걸리는 옛 보부상길이다.

십이령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산짐승과 도적떼들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어 보부상들은 항시 2, 30명씩 떼를 지어 움직였고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내부적으로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산임방절목(禮山任房節目)중에는 다음과같은 보부상들의 엄격한 규칙이 전해진다.

1.부모에 불효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자는 볼기 50대를 친다.

2.선생(조직의 우두머리)을 속이는 자는 볼기 40대를 친다.

3.시장에서 물건을 억지로 판매하는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4.동료에게 나쁜 짓을 한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5.술주정하면서 난동을 부린 자는 볼기 20대를  친다.

6.불의를 저지런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7.언어가 공송하지 못한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8.젊은 사람으로서 어른을 능멸한 자는 볼기 25대를 친다.

9.질병에 걸린 동료를 돌보지 않은 자는 볼기 25대를 치고 벌금 3전을 물린다.

10.놀음 등 잡기를 한 자는 볼기 30대를 치고 벌금 1냥을 물린다.

11.문상하지 않은 자는 볼기 15대를 치고 벌금 5전을 물린다.

12.계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자는 볼기 10대를 치고 벌금 1냥을 물린다.

13.부고를 받고도 연락하지 않은 자는 볼기 10대를 치고 벌금으로 부조로 낼 돈의 두 배를  물린다.

14.모임에서 빈정대며 웃거나 잡담하는 자는 볼기 15대를 친다.

그리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외부의 소식을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계층이 보부상이었다.

 

 

포토르포 客主문학관  사진.편집 丁海酉  2014.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