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0여점의 골동품 (骨董品)들로 50~80년대를 재현한 추억의 달동네 .그시절 군복, 교복, 교모로 추억과 낭만을 체험할 수도 있다.

↑ 追憶의 달동네 들머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자동차 조랑말 '포니( Pony)'가  관객을 맞는다.  Hyundai Pony는 1975년부터 1990년     까지 현대    자동차가 생산한 후륜구동 소형차이다.

↑  그때 그랬었지! 추억의 군시절 위병 초소앞의 원산폭격이 정겹다.

↑  내무반에 누워 여유를 즐기는 말년의 병장, 열심히 군화를 닦고 있는 이등병, 반합으로 끓인 라면을 먹는 상병의 모습이 재미있다

 ↑  그 시절을 풍미했던 정객들 김두한,차지철,박정희,윤보선 ......추억의 달동네 벽에는 선거 포스터가 그 시절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다.
1963년 10월 15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4,702,640 표로 당선되었다. 윤보선 민정당 후보는 4,546,614 표를 얻었다.  

↑ 가게 앞에서 할아버지가 튀밥을 튀기고 있는 '순이점빵' 점빵의 물건들은 그 시절 우리들이 사용했던 추억의 생필품들이라 정겹다.

↑ 배고팠던 그 시절, 달걀귀신 처녀 귀신....그때는 화장실에 웬 귀신이야기가 그렇게 많았던지! 해가 떨어져 깜깜한 외부 화장실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은 요강에서 볼일을 본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 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어머니는 바느질이 일상이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가족계획 구호가 지금 생생하다.
전형적인 농업사회였던 60년대 출산율은 5.4명으로 집집이 6남매는 기본이었다. 전쟁 후 급격히 늘어난 인구가 경제성장에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출산율이 높은 농촌을 중심으로 가족계획이 국가적인 과제였던 것이 반세기 만에 출산율, 세계 224개국 중 219위, OECD 중에선 꼴찌로 저출산이 국가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 찌질이도 못살았던 보릿고개 그 시절 부엌 살림살이 먼 이야기도 아니다 1970년대 우리가 살았던 모습이다.

↑  추억의 달동네 골목에서 말 타기 놀이를 하는 그 시절의 아이들이 정겹다.  70~80세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이다.

↑  추억의 달동네 골목에는 그 시절의 생활상이 펼쳐진다. 원기소를 파는 장수약국이 정겹다.

↑ 흙먼지 펄펄 나는 시골 버스 정류장 탕탕 오라이 버스 안내양 그때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 배고팠던 그시절 국민등학교 난로위에 양은 도시락을 첩첩히 쌓아 탑을 만들었다. 춥고 배고팠던 그시절 꽁꽁 언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먹던 그 도시락이 요즘은 왜 그리 그리울까! 일부러 양은 도시락에 밥에 담아 파는 곳이 있다고 한다. 잘 사는 집애들은 쌀밥에 멸치볶음&달걀프라이가 최고의 반찬이고 못사는애들은 까만 꽁보리밥에 날된장 한 덩어리가 다반사였다. 그 시절에는 철따라 반찬도 달랐다 겨울은 김치, 봄에는 골벵이(논우렁이)무침, 가을에는 며뚜기 조림…….
아버지가 오일장날 새끼줄에 한 묶음 사온 간잽이 꽁치를 짚풀에 구워 먹던 그 맛이 내 생애의 최고의 맛이었다.

↑ 배고팠던 그 시절 국민학교 3학년 1반 교실. 70년대 산업화 시대 가난하니 못 배웠고, 못 배웠으니 무식했던 시골 처녀 총각들이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집어 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살길을 찾아 열심히 일하다가 명절날 한 아름 선물을 안고 고향에 내려온 공순이, 공돌이들의 뒤를 따라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찌질이도 가난했던 철수와 영이가 하얘진 얼굴에 짝 빼입고 선물을 한 아름들고 코스모스 피어있는 고향 마을 동구 밖을 들어서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서울로 튄 것이다.

↑  추억의 달동네 소망 국민학교앞 게림문방구에서 남녀 관광객이 그시절의 교련복,교복에 교모를 쓰고 셀카를 날린다.

↑  50~60년대는 전형적인 대가족 농업사회로 집집이 6형제 7형제는 보통으로 농촌인구는 차고 넘쳐 마을마다 이발소가 있었으나 추석, 설 대  목이면 날밤을 셀만큼 바빴다. 그때는 이발을 않으면 명절을 못 세는 줄 알았다.그때는 이발사가 일등 신랑감이기도 했다. 
 반세기 전에 일인데 지금의 시골엔 면 단위에 이발소가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 석유풍로 고데기로 멋을 부리던 그 시절이 그립다.

↑  50~70년대는 그랬었지. 읍내 빵집은 남녀학생들의 사교의 전당이었지.
학창시절에 함께추었던 잊지못할 사랑에 트위스트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추억속에 사랑에 트위스트 .....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란 노랫말이 그 시절을 잘 말해주고 있다. 지금쯤 그 여학생도 어느 하늘 아래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추억의 달동네 그 시절의 빵집 앞에서 타임머신에 타고 추억과 낭만에 젖어본다.

↑  추억의 달동네 신발가게. 그 시절 실제 생필품들이 추억의 꼬투리를 열게 한다. 추석 빔 검정고무신이 닳을까 봐 장롱 위에 모셔두고 맨발 로 다니던 그 시절의 추억이 어제처럼 정겹다.

 

↑ 50~60년대 그 시절의 신혼 첫날밤. 그때의 결혼식은 마을 잔칫날이다. 마을 사람들은 묵이나 단술 등 잔치음식 부조로 축하한다. 이시절은 신랑 얼굴을 첫날밤에 처음으로 봤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아들딸의 배우자 선택은 당사자보다 양가 부모님이 절대적이었다.

↑ 그 시절 읍내 거리 .보광당 금은 보석가게 ,서라벌라사 양복점이 정겹다.

2015.8.31 글.사진 丁海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