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의 혼이 깃든 병산서원

▲  진분홍 배롱나무꽃.만대루,입교당.낙동강이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그리는 8월의 병산서원

로는 화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병풍을 둘러친듯한 병산(안산) 아래로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는 언덕위의 병산서원은 지금(2015.8.3) 배롱나무 꽃잔치를 벌려 한폭의 산수화를 그린다.

8월의 병산서원 꽃그늘을 거니는 나그네는 아름다운 풍경과 정취에 발길을 뛰지 못한다.
병산서원의 풍경은 배롱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8월이 으뜸이다.  봄이나, 겨울에 병산서원을 들린 사람은 별로 든데 하겠지만, 빨간배롱꽃으로 단장한 8월의 병산서원의 모습은 봄 가을과는 그 풍경이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배롱나무 아이콘인 병산서원의 뜰과 정원에 빼곡히 들어선 배롱나무 꽃이 절정인 8월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어 가을 단풍을 무색게한다.

진분홍색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 그 풍광에 반해 일부러 한 여름에만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병산서원의 배롱나무꽃은 인기가 높다.
병산서원 경내와 외곽은 온통 배롱나무 천지지만,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곳은 입교당 뒤안 존덕사 뜰의 배롱나무 숲과 고가의 지붕과 기와담이 그리는 풍경이다.

이곳의 배롱나무숲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 보호수(경상북도 고시 제2008-165호 6그루 )로 법적 지위를 누리는 나무이기도하다.

보호수 배롱나무들은 존덕사를 건립하던 1614년경에 심어진 것으로 수령이 400 여 년으로 추정되며 키는 6∼9m, 나무 둘레가 80∼90cm에 이르는 거목으로 수령이나 크기, 역사성으로 볼 때 희귀목중의 하나로 수형이 이쁘다.

배롱나무(木百日紅)는 7∼9월에 100일 동안 꽃이 피고지다를 반복한다고 하여 흔히 백일홍(百日紅)으로 불려지는데, 나무껍데기 없이 매끈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청렴결백한 선비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하여 서원이나 정자목으로 몇 그루씩 볼 수 있지만 생장속도가 늦어 잘 보존된 군락은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다.

특히 이곳 병산서원의 존덕사 뜰의 배롱나무꽃(보호수)이 허드러지게 피어나는 이맘때는 혼자 보기 아까운 풍경이다.

일반적으로 병산서원을 둘러보는 여행객들은 입교당과 동.서재를 둘러보고 만대루에 오르는 것으로 끝나지만, 병산서원의 진짜배기 볼거리는 입교당 뒤안이다.

입교당, 장판각, 존덕사와 계단 , 전사청 쪽문과 기와 담장이 어우러져 그려내는 한폭의 풍경화를 못보고 돌아서면 병산서원의 껍데기만 본 격이라 할 수 있다.
고가 지붕과 기와 담장으로 축 늘어진 배롱나무 진분홍 꽃가지가 그려대는 그림은 흡사 한 장의 그림을 보는 듯한 정취로 다가온다.
이곳을 들리는 사람치고 그 정취(情趣)와 감흥(感興)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이가 없다.

인근 하회마을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사계절 붐벼 때가 많이 묻었지만, 이곳 병산서원은 십릿길 비포장 흙길과 으슥한 곳에 자리한 탓인지 인적이 드물어 아직까지 배롱나무꽃가지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기도하다.

일요일(2015.8.2) 대단원의 막을 내린 사극 "징비록"의 영향인지 폭염특보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이곳 존덕사에는 사극 징비록의 주인공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屛山書院 )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류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 제작을 비롯하여 군비 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 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되었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며, 한국 건축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이다.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본관( 本貫 )은 풍산( 豊山 )으로 명종 19년(1564) 사마시를 거쳐 도승지,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등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시에는 영의정으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도체찰사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화기제작, 성곽 수축 등 군비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선조 31년(1598) 북인들의 탄핵으로 한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며 국보 제132호 징비록 (懲毖錄)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 문장, 덕행,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후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2015.8.3  글.사진(스마트폰 SM-C115L) 르포라이터 丁海酉

 

▲  병산서원 복례문

▲  만대루에서 내려다 본 복례문

▲  병산서원 만대루

▲  입교당에서 내려다 본 만대루

▲  병산서원

▲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

▲  병산서원에서 전사청으로 통하는 쪽문

▲  존덕사 계단에서 내려다 본 8월의 병산서원

▲  병산서원 뒷간

▲  병산서원 뒷간이 배롱나무꽃과 어울려져 이쁘다.

▲  병산서원 주차장에서 바라 본 낙동강과 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