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한(恨)과 정(情)을 노래한 향토음악인 정귀문(鄭貴文)
              바다가 육지라면,  마지막 잎새, 먼후날, 동네방네 뜬소문......외 1,000여곡을 만든 향토 음악인 정귀문. 

             동영상으로 보기 → 한(恨)과 정(情)을 노래한 향토음악인 정귀문(鄭貴文)                            2008.11.22 글.그림  르포라이터 정해유



▲  1971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민족가수 배호(1942∼1971.본명 배신웅) 는 한(恨)의 정(情)이  담긴 노래를 가장 좋은 목소리로 애절하게 불렀다는 평가를 받는 가수이다.

 르포 / 한(恨)과 정(情)을 노래한 향토음악인 정귀문(鄭貴文)

- 바다가 육지라면, 마지막 잎새, 먼후날, 동네방네 뜬소문......외 1,000여곡을 만든 향토 가요 작사가 정귀문 -


"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파도가 길을막아 가고파도 못갑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떠난 부두에서 울고있지 않을것을 아--- 아--- 바다가 육지라면 이별은 없었을 것을 "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 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 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
'바다가 육지라면', '마지막 잎새' 작사가 정귀문(鄭貴文)은 고향의 한(恨)과 정(情)을 담은 주옥같은 가요 1,000 여곡을 만들어 국민의 심금을 울린 향토 음악인이다.
신라의 땅 고도 경주 현곡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고향(경주시 현곡면 하구3리 1057번지)을 떠난적이 없이 지금껏 고향마을을 지키며 고향을 소재로 서정적(抒情的)인 노랫말을 만드는 진정 대한민국 가요 창작인이다.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 지고 마지막 잎새가 허공을 가르는 초겨울인 지난 11월22일 '마지막 잎새' 노래비를 찾아 보았다.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작사가 정귀문(정문) 선생의 고향이자 현재 거처이기도 한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저수지 소공원에 건립되었다.
이 노래비는 가수 배호의 영.호남 팬클럽의 성금으로 경주시에서 부지를 제공받아 2003년 6월 22일 노래비가 제막 되었다.
경주시 금장에서 북서쪽 영천 고경 28호 국도와 이어지는 925번 지방도(아래 지도 참조)를 타고 조금 가면 하구,가정리를 지나 얕으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남사 저수지이다. 뒤쪽으로 남사리고 맞은편은 어림산 고개로 영천 가는 길이다.
925번 지방도에 붙어있는 남사저수지가에는 서너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 소공원이 꾸며지고 이곳에는 '마지막 잎새' 배호의 노래비가 세워져있다. 그냥 앞만 보고 가노라면 그냥 칠 수 있는 위치이다.
노래비 정면에는 '마지막 잎새 '노랫말, 기둥에는 '불세출의 가수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라고 새겨져있고, 측면에는 가수 배호의 약력, 작사가 정귀문의 약력 그리고 뒷면에는 '마지막 잎새' 노래비 건립 경위를 새겼다.
'마지막 잎새 ' 노래비 앞에는 누군가가 가져놓은 메마른 하얀 국화꽃 네 송이가 찬 바람에 떨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11월 7일 배호의 37주년 기일을 맞아 누군가가 추모한 듯하였다.
비(碑)는 사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이나 쇠붙이, 나무 따위에 글을 새기어 명소(名所)에 세우는게 일반적인데,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그냥 904번 지방도 저수지가에 세워졌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리고 이곳에 '마지막 잎새 ' 노래비가 있는지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알고 보면 세워 질 만한 곳에 세워졌는데.....
남사못이 있는 현곡은 '마지막 잎새'의 노랫말 탄생지이다. 남사못 아랫마을인 하구마을에는 우리나라 가요 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귀문 선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마지막 잎새’, ‘바다가 육지라면’ 등 숱한 인기 가요 1,000여 곡의 노랫말을 지은 정귀문(예명 정문)씨는 정(情)과 한(恨)을 노래한 서정적인 향토 음악인이다.우리나라 가요 사에 끼친 공으로 제12회 한국가요 창작인 공로대상(1998 ), 제6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상(1999)을 수상하였다.
정귀문 작가는 1941년생으로 27세 때인 1968년 KBS방송가요(숲 속의 외딴집)발표를 시작으로, TBC신가요 박람회(그림)발표. (만추)로 세광출판사 추천가로 데뷔하였다.
40년 간 그가 만든 주옥같은 노랫말은 1,000여곡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작으로 '마지막 잎새'.'바다가 육지라면'.'먼훗날'.'동네방네 뜬소문'을 손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노래비를 가진 가수로는 극민가수로 추앙받는 고 배호씨를 꼽을 수 있다.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 발상지인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삼각지 교차로의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2001.11.13), 배호의 유택인 경기 양주군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의 '두메산골' 노래비(2002.4.21), '마지막 잎새' 탄생지인 경주시 현곡면 남사 소공원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2003.6.22), 그리고 강릉시 주문진의 '파도' 노래비(2003.7.12) 등 네곳이다.
네곳 중 노래의 탄생지로 노래를 만든 음악인이 거주하는 곳에 세워진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어느곳보다 뜻이 깊다고 하겠다.
이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정귀문 선생이 육성으로 전한 '마지막 잎새' 노래를 만든 일화는 이러하다.
바람 한 점없이 서리라도 내릴 듯한 달빛만 싸늘한 1970년 어느 가을 밤.
현곡초등학교 돌담장를 걷던 29세의 문학청년 정귀남은 흐느적대며 떨어지는 손바닥만한 플라타너스 낙엽 한 장을 무심코 잡아든다.
당시 현곡초등학교 담장 가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담 너머로 가지를 길게 뻗어 늦가을이면 수많은 낙엽을 흩날렸다.
알싸한 밤 공기를 가르며 허공을 맴도는 마지막 입새를 잡은 정기문은 불현듯 소년기 때 이별한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무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낙엽이 곧 자신의 분신인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 친구란, 까가머리 소년 시절 한 살 아래의 현곡국민학교(당시 교명) 교장선선생님의 딸이었다. 그 소녀와 친구로 지내든 정기문은 첫사랑의 속알이를 대단히 했었다 . 세월은 흘러도 그 소녀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시절 그 소녀의 생각에, 그 옛날 뛰놀던 달빛이 싸늘한 운동장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으며, 좋아한다 말한마디 못하고 헤어진 그 소녀에 대한 심경을 문학 청년 정귀문이 가다듬은 노랫말이 바로 '마지막 잎새'이다.

1.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덧 낙엽 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 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2.싸늘히 부는 바람 가슴을 파고들어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거리
애타게 부르며 서로 찾을걸
어~이해 보내고 참았던 눈물인데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마지막 잎새'는 인생의 무상함을 반추하는 애절한 정서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명곡이다.
'마지막 잎새' 노래비문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 천재 요절가수 백호님.
우리는 숨쉬기조차 버거워하며 필사적으로 들려주었던 님의 노래 '마지막 잎새'를 기억하합니다.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또한 후덕한 고장 경북 경주시 현곡면 .
바로 '마지막 잎새'의 탄생지이자 글을 쓰신 정귀문 선생님의 고향임을 기억합니다. 바람 한 점없는 1970년 어느 가을 밤 .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에 힘없이 달려 있던 나무잎들이 우수수 낙엽이 되었습니다. 호기심에 떨어진 낙엽을 집어든 정귀문 선생님은 불현듯 소년기 때 이별한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사무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낙엽이 곧 자신의 분신 인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 심경을 담은 '마지막 잎새'는 인생의 무상함을 반추하는 애절한 정서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노랫말로 옮긴 명곡입니다.
이듬해인 1971년 7월 작곡가 배상태님이 곡을 붙여 배호 님은 그의 유작앨범이 된 '0시의 이별 앨범'에서 이 노래를 발표했습니다.
4개월 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29살의 젊은 나이에 배호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인기순위 4위 곡 '마지막 잎새' 는 온국민의 가슴을 적시며 오히려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지요.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불세출의 가수 배호님의 '유작 노래 창작자'라는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정귀문 선생님의 '마지막 잎새' 노랫말을 기념하려 합니다.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등 수많은 히트곡들을 발표하셨지만 늘 아마추어 정신으로 고향을 사랑하며 고향에 살며 1000여 곡의 한국대중가요를 창작해오신 현곡이 낳은 명작사가 정귀문 선생님.
그 분의 고집스런 창작인생이 배호님의 유작 노래비 '마지막 잎새'에 담겨져 후세에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 뜻 있는 분들이 작은 정성을 담아 이 노래비를 바칩니다. 2003년 6월 22일 www.baehofan.com 』

'마지막 잎새', '0 시의 이별', '안녕', '또하나의 이별' , '파란낙엽' 등의 노랫말이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감을 받게 된다.
배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하듯 '마지막 잎새'를 부르다 무대에서 쓰러졌다. 그가 떠난 71년11월은 미처 떨어지지 않은 가로수의 낙엽까지도 슬픔에 하나둘씩 사그러 들었고, 팬들은 그의 타계를 슬퍼하고 애도하였다.
북잽이 무명가수로 출발하여 생을 마감때까지 투병(신장염)으로 사투를 반복했던 배호의 데뷔곡은 '굿바이(63년)',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인 '마지막 잎새'와 '영시의 이별'이 유작이 되었다. 배호는 이상하게도 노랫말처럼 파란낙엽되어 2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마지막 잎새'를 한(恨)이 맺히게 마지막 노래로 목메어 부르고 배호가 타계했다는 비보를 작사가 정귀문씨는 고향마을 하구리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다가 접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배호의 기일(11.7)이면 깊은 생각에 빠진게 된다고 한다.
자신이 만든 '마지막 잎새' 제목 처럼 마지막 노래가 되어 팬들의 살려내라는 항의를 많이 받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필자가 알고있는 정귀문 선생은 가요계의 선비이시다.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다.
음악인생 40년.
수많은 힛트 가요의 유명작가로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않고 평생을 흙에 살면서 의리와 원칙을 지키는 겸손한 예술인이다. 이 시대의 선비라 칭하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분이시다.
논두렁에서, 낙엽지는 거리에서 혹은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만들어진 정귀문 선생의 주옥같은 가요는 대중의 가슴에 녹아 상처를 어루만지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였다.
매주 수요일 2시면 포항 mbc에서 정귀문 선생의 목소리가 전파를 탄다. "싱송생송 전화노래방"의 심사를 맡고있다. 아마도 그의 얼굴은 몰라도 목소리는 귀에 익은 청취자들이 많을 것이다. 정귀문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제일 행복하게 사시는 분이다.

신라의 얼이 담긴 화랑중학교 교가도 지어 .

2008년 3월에 개교한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191 소재 화랑중학교(교장 김상조) 교가 노랫말을 학생들이 쉽게 부르고, 응원가로도 불려 질 수 있는 교가 노랫말을 만들었다.
신라의 얼이 담긴 화랑중학교 교가도 지어 .
2008년 3월에 개교한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 191 소재 화랑중학교(교장 김상조) 교가 노랫말을 학생들이 쉽게 부르고, 응원가로도 불려 질 수 있는 교가 노랫말을 만들었다.

1. 동해의 해오름이 토함재 넘어
서라벌 온 누리에 빛을 뿌리고
찬란한 신라문화 살아 숨쉬는
황금빛 기름진 땅 형산강 강가
보아라 우뚝 섰다 화랑중학교
아 슬기롭게 바르게 자라
떨치자 우리모교 화랑중학교

2.해넘이 구미봉에 메아리치던
화랑의 말굽소리 우렁찬 함성
전통과 새로움이 한데 어우러
억만년 이어 나갈 신라의 옛터에
자태도 늠늠하다 화랑중학교
아아 빼어나게 더 크게 바르게 자라
떨치자 우리모교 화랑중학교 "

   2008.11.22 글.그림  르포라이터 정해유 



 
화랑중학교 교가
           
정귀문 작사 . 박지명 작곡

1. 동해의 해오름이 토함재 넘어
서라벌 온 누리에 빛을 뿌리고
찬란한 신라문화 살아 숨쉬는
황금빛 기름진 땅 형산강 강가
보아라 우뚝 섰다 화랑중학교
아 슬기롭게 바르게 자라
떨치자 우리모교 화랑중학교

2.해넘이 구미봉에 메아리치던
화랑의 말굽소리 우렁찬 함성
전통과 새로움이 한데 어우러
억만년 이어 나갈 신라의 옛터에
자태도 늠늠하다 화랑중학교
아아 빼어나게 더 크게 바르게 자라
떨치자 우리모교 화랑중학교 "

▲  2008.11.5 화랑중학교로부터 감사장을 받음

 

 ▲  '마지막 잎새' 노래비는 작사가 정귀문(정문) 선생의 고향이자 현재 거처이기도 한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남사저수지 소공원에  건립되었다.  이노래비는 가수 배호의 영.호남 팬클럽의 성금으로 경주시에서 부지를 제공받아 2003년 6월 22일  노래비가 제막되었다.


▲  '마지막 잎새' 노래비 가는 길

 

 

 

 ▲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비를 찾아 그 시절 그 추억을 반추하며 '마지막 잎새' 불러 보는 작사가 정귀문 선생 .
정귀문씨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현곡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고향(경주시 현곡면 하구3리 1057번지)을 떠난적이 없이 지금껏 고향마을을 지키며 고향을 소재로 서정적(抒情的)인 노랫말을 만드는 진정 대한민국 가요 창작인으로, 제12회 한국가요 창작인 공로대상(1998 ), 제6회 대한민국 연예 예술상(1999)을 수상하였다.

 ▲  자택 가요 연구실에서 배호의 '마지막 잎새' 노래를 불러보는 작사가 정귀문 선생

 ▲  자택 가요 연구실에서 '대표작인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 그 추억에 젖어보는 정귀문 선생

 ▲  '마지막 잎새' 노래의 탄생지인 현곡초등학교

 ▲  '마지막 잎새' 노래의 탄생지인 현곡초등학교 플라타너스 나무는 가지를 잘리우고 옛 모습 그대로 교정을 지키고 있다.

▲  '마지막 잎새' 노래의 탄생지인 현곡초등학교 플라타너스 나무를 찾아 감회에 젖는 정귀문 선생.
바람 한 점없이 달빛만 싸늘한 1970년 어느 가을 밤.
현곡초등학교 돌담장을 지나든 문학청년 정귀남은  흐느적대며 떨어지는 손바닥만한 플라타너스 낙엽 한장을 무심코 잡아든다.
당시 현곡초등학교 담장가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담장넘어로 가지를 길게 뻗어 늦가을이면 수 많은 낙엽을 흩날렸다.
알싸한 밤공기를 가르며 허공을 맴도는 마지막 입새를 잡은 정기문은 불현듯 소년기 때  이별한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무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낙엽이  곧 자신의 분신 인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 친구란,  까가머리 소년시절 한살 아래의 현곡국민하교(당시교명) 교장선선생님의 딸이었다. 그 소녀와  친구로 지내든 정기문은 첫사랑의 속알이를 엄청했었다.세월은 흘러도 그 소녀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 시절  그 소녀의 생각에, 그 옛날 뛰놀던 플라타너스 교정을 터벅터벅 걸으며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다. 좋아한다 말한마디 못하고 헤어진 그 소녀에 대한  심경을 문학 청년 정귀문이 가다듬은 노랫말이 바로  '마지막 잎새'이다.
 

 

 

 

 

 

 

 

 

 

 

▲  우리나라 가요사에 이름이 크게 새겨 질 정귀문 선생의 주옥같은 노래들

 

 ▲  추억의 편린

 ▲  추억의 편린

 ▲  추억의 편린

 ▲  추억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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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 글  ------

요절가수 배호
  
펌)컬쳐뉴스  / 글 : 김형찬(대중음악연구가)

   
외삼촌인 김광빈 악단에서 드러머로 가끔 노래도 하던 그는 1964년 <두메산골>로 데뷔한 이후 김광빈 악단에서 독립하여 ‘배호와 그 악단’을 창단하여 그룹과 솔로 활동을 병행한다.

점심도 굶고 초저녁에서 밤늦게까지 드럼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술담배를 가까이 했으니 몸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급기야는 1966년 2월 밤업소 공연을 마치고 돼지고기를 먹고 식중독이 걸렸는데 그것을 계기로 급성신장염을 앓게 되었다.
투병중이던 그는 1967년 3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돌아가는 삼각지>를 취입했는데 이 곡은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와 1966년 최희준의 <하숙생> 이후 최대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배호는 제대로 치료도 못 하고 음악활동을 하다가 1967년 10월 무대에서 노래하다 쓰러지고 만다.
그 이후 그는 진득하게 치료를 하지 못하고 무대에서 쓰러지기와 입원을 반복한다.
오히려 이런 그의 모습이 청중들의 열광을 불러왔고 배호의 치료를 소홀하게 만들었다.

12월 2일 다시 시민회관 무대에 나타났다. 문화방송 개국기념잔치에 이은 10대가수선정에 참석한 것. 동료가수 이상렬과 작사가 전우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등단했을 때 장내는 한동안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그가 당초의 예정을 변경해서 의자에 않은 채 <누가 울어> <당신> <만나면 괴로워> 등 3곡의 접속곡을 부를 때(부른다기 보다는 노래하는 시늉이란게 더 적절한 표현이지만) 장내는 박수갈채와 눈물의 뒤범벅을 이뤘다...

그가 입원하고 있는 인사동의 신한병원 302호실에는 그 뒤 소녀팬들의 방문이 부쩍 늘어났다.
꽃을 사들고 오는 여고생, 들어서자 울음을 터뜨리는 중학생, 간호를 자청하는 여대생 차림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줄을 지어 있다.
「병상에서 왜 울어 노래하는 배호」, 『선데이서울』 69.12.24, 11쪽

결국 1971년 10월20일 MBC의 심야프로「별이 빛나는 밤에」 출연하고 나와 몸살기운을 느끼고 드러누운 이후 배호는 일어나지 못하고 11월7일 미아리를 넘던 구급차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11월11일 가수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차중락 못지않은 팬들의 열광이 나타났다.
소복을 입은 수많은 여성 팬들과 조문 나온 팬들로 인산인해가 되었으며 서로 밀치다가  나중에는 의자와 몽둥이가 날아다닐 정도로 흥분한 팬들까지 생기는 혼잡을 이루기도 했다. 장례후에는 3일간 집앞에서 불을 지피며 추모를 하기도 했다.

배호 팬들의 열광과 충성은 배호 사후에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01년 만들어진 배호기념사업회는 전국적인 지부를 두고 배호에 대한 체계적인 추모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 배호묘역에 <두메산골> 노래비, 강원도 강릉 주문진읍 <파도> 노래비, 경북 경주시 현곡면 <마지막 잎새> 노래비를 세웠고 <삼각지로타리>의 지명인 용산구청에서 <삼각지로타리> 노래비를 세움으로써 가장 많은 노래비를 가진 가수가 배호인 것이다.
아울러 용산구청은 삼각지로타리 이면도로를 ‘배호길’로 명명함으로써 최초로 가수의 이름이 지명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강릉 배호가요제, 인천배호가요제, 대한민국 트로트가요제 등 배호를 기리는 가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런 배호의 대한 전국민적 열광의 원인은 무엇일까?
배호의 애절하고 구슬픈 노래는 개발독재시대를 살았던 서민들의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는 힘을 지녔던 것이 아닐까?
굵직한 저음, 부드러운 중음, 호소력있는 고음까지 모두 지닌 배호의 가창력은 이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호는 열심히 병을 치료하여 팬들의 성원에 오래도록 답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오랜 무명생활 끝에 정상에 오른 배호는 성격상 진득하게 자신을 추스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또한 ‘무대에서 쓰러져야 진정한 가수다’ 라는 가요계의 과장된 신화도 배호를 파국으로 몰고 간 원인이었던 것 같다.
죽음에 유달리 관대한 한국인의 심성이 요절가수에 대한 열광을 낳은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요절가수들이 그 만큼 음악성이 뛰어났고 그 많은 재능을 소진시키다보니 죽음에 이르렀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요절가수들에 대한 예우이고 그들에 열광한 팬들의 정서에 부응하는 길이 될 것이다.  
  2008.11.22 편집 정리 丁海酉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