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9대 진사,12대 만석꾼 경주 최부자의 수신제가(修身齊家)
※ 수신제가(修身齊家) :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림.

- 경주 최 부잣집의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린 육훈(六訓)과 육연(六然) ,가정식과 비주 -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교동최씨고택의 사랑채 
경주 최 부잣집  99칸 대가의 일부인 '요석궁’이라는 한정식집을 지나면 최부자집을 알리는 ‘경주 최씨 고택’이라고 쓰인 간판이 대문 앞에 서 있다.
그 옆집은 최부자집에 전해오는 비주인 경주 교동법주를 빚는 한옥이다. 최부자집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로맨스가 어린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의 한정식집인 요석궁은 이두문자의 창시자 신라의 대문장가인 설총이 태어난 곳이다.
원래 경주 최 부잣집은  부지 2000여 평에 1만여 평의 후원도 있는 아흔아홉칸의  민간 궁궐같은 집으로 그 집에 살던 노비만도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최근 복원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 창고만 남아 있는 상태다.

이 사랑채에는 당대의 기라성 같은 손님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구한말 영덕 출신의 의병장 신돌석(申乭錫) 장군,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 강점기 때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이 왕세자 시절에 경주 서봉총(瑞鳳塚)의 금관을 발굴하기 위해 경주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최 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다. 그리고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두 사람은 이 집에서 1년 이상 머무르며 ‘동경지(東京誌)’를 편찬하기도 한 유서깊은  곳이기도하다.

 대한민국 일등으로 큰 최부잣집 뒤주
최 부잣집의 마당 한 쪽에 위치한 쌀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대한민국에서 개인 집 뒤주로는 가장 큰 규모다. 당시 가을 추수가 끝나면 각지에서 날라온 쌀을 저장하였는데 이 뒤주에는  800석의 쌀이 들어 같다고 한다. 이런 뒤주가 몇 개 더 있었는데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이것 한 채 뿐이다.

 최부잣집의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에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어서, 곧장 못 들어가고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는 여자들의 살림공간인 안채 내부를 바깥에서 정면으로 볼 수 없게끔 고려한 장치로 일종의 발을 쳐놓은 것과 같다.

 최부잣집의 안채

 9대 진사 12대 만석꾼 경주 최 부잣집의 제가(齊家) 철학 육훈(六訓)
 
 - 200년 전통의 최부잣집 집안을 다스리는 지침 -
 제가(齊家)의 사전적 의미 : 집안을 잘 다스려 바로잡음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 흉년 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경주 최부잣집에 내려오는 200년 전통의 제가(齊家) 철학 육훈(六訓) 이다 

부불삼대(富不三代, ), 졸부(猝富) 졸망(猝亡) 이라, 예로부터 부는  3대 지키기 어렵고, 요즘의 부는 이루는 것도 빠르고 망하는 것도 빠르다는 말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졸부가 아닌 명부(名富)의 면모를 보여준 집안으로 9대 동안 진사를 지내고 12대 동안 연이어 만석을 한 집으로 조선팔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집이 된 연유는 200년 전통의 최부잣집 가훈 때문이렸다.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당쟁으로 지샌 조선시대는 벼슬이 높아지면 자의 반 타이 반으로 당쟁에 휘말려 역적으로 지목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진사(進士)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한마디로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조선시대 진사라는 신분은 초시(初試) 합격자를 가리키는데, 벼슬이라기보다는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양반 신분증이었다.

○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경주 최부잣집은 재산이 만석을 초과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소작료를 낮춰 사회에 환원하여 주변 소작인들은 최부잣집의 논이 늘어나기를 원하는 현상이 발생할 정도로 인심을 얻었다.

○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기도 하고 ,  굶어죽을 지경이면 흰 죽 한끼 얻어먹고 논을 내놓았다. 우선 먹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논값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가진 자들은 흉년이 들면 논을 불리는 기회였으나 경주 최부자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보아 흉년에는 논을 사지 않았던 것이다.

○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조선 시대에는 과객이 양반집이나 부잣집의 사랑채에서 며칠씩 머물면서 다른 지역의 정보를 전해주는 메신저 노릇을 하였으며 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최부잣집의 1년 소작 수입의 1/3인  쌀 1천석은 과객 접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최부잣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교동에서 사방 100리라고 하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에서 서로는 영천까지고, 남쪽으로는 울산까지, 북으로는 포항까지의 영역이다.주변이 굶어 죽고 있는 상황인데 나 혼자 만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부자양반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소작수입 가운데 1천석을 주변 빈민구제에 사용한 것도 이런 차원

○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조선시대 곳간의 열쇠는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 정신이 중요하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숟가락도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백동 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과객 대접에는 후했지만 집안 살림에는 후하지 않았던 것이다.

 

 9대 진사 12대 만석꾼 경주 최부잣집의 수신(修身) 철학 육연(六然)
- 자신을 지키는 지침 -
※ 수신(修身)의 사전적 의미 : 악을 물리치고 선을 북돋아서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함.  

-.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
-.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
-.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전쟁이 일어나면 솔선수범하여 피를 흘리고,  공중을 위해 자기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로마의 귀족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철학이 로마 천년을 지탱한 것처럼 천년 고도 경주에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낸 명가(名家)를 지켜온 것도 최부잣집의 자신을 지키는 지침인 "노블리스 오블리제" 수신 철학이다.

"경주교동법주"는 최부잣집의 특유한 가주로 맏며느리만이 전수받아 빚을 수 있다고 한다.교동법주는 가을 추수 후 햅쌀로 만들어서 초봄까지만 먹는 술로 온도가 올라가는 여름에는 상하기 때문에 담글 수 없다고 한다.

 

 요석궁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로맨스가 어린 곳으로 유명하다. 그 로맨스로  요석궁에서 이두문자의 창시자 신라의 대문장인 설총이 태어난 곳이다.
원효(元曉) 성사(聖師)가 파계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무렵으로 서라벌 거리에서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나.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박으리.” 라고  노래했다.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란 노래의 뜻을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만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아마도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당시에 요석궁(瑤石宮)에는 백제와의 전투에서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둘째 딸 요석궁주가 떠올랐던 것이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瑤石宮)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을 받아 원효를 찾고 있을 때에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汶川橋)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나졸들은 문천교 밑에 숨어 있다가 원효가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길을 막은후 요석궁(瑤石宮)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원효가 껄껄 웃으며 못 가겠다고 하자 나졸 중의 대표 한 사람 이 자신과 무술을 겨루어 대사가 지면 요석궁(瑤石宮)으로 가고 반대로 이기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말에 대사는 족히 승낙을 하고 무술을 겨루었는데 출가하기 전 낭도로서 무예가 특출했던 원효와 나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요석궁(瑤石宮)으로 꼭 모시고 오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나졸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원효에게 달려 들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대사는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떨어뜨리니 다리 밑에는 허위적거리는 나졸들이 점점 늘게 되었다.
마지막 나졸 한 명과 함께 원효가 문천교 밑으로 일부러 빠지니 나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요석궁(瑤石宮)으로 모시고 갈 수 있었다. 궁리가 원효를 요석궁(瑤石宮)으로 인도하여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게로 원효는 대궐에서 3일 동안 공주와 함께 지냈다. 3일이 지난 후 아무도 모르게 궁을 빠져 나왔다. 그 후 요석공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10달이 지난 후 신라 10현인 중 한 분인 설총(薛聰)을 낳았다

 

 일본식 정원의 고궁같은 요석궁

 일본식 정원의 고궁같은 요석궁

 요석궁의 최부잣집 가정식
지금의 고급 한정식당 요석궁은 경주 최부잣집  99칸 대가의 일부로 신라 29대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거처하던 요석궁터 였다.
이곳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가 전해지고 설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요석궁의 한정식은 말이 가정식이지 웬만한 부잣집 잔치상에 버금갈 만큼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 나오지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밥집이 아니다. 반월정식(점심 22,000원),계림정식(33,000원),안압정식 55,000원,포석정식(77,000원), 요석정식(110,000원) 등이 요석궁의 상차림으로 비싸다.  요석궁은 예약을 원칙으로 하나 자리가 빌 때면 비예약객도 이용할 수 있는데 ......
경주 여행길에 최부자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호기심이 발동하여 친구랑 요석궁에서 최부잣집 가정식인 계림정식(33,000×2=66,000원) 상차림을 대면하게 되었다.  값도 비쌌지만, 전라도 음식과 혼합된 맛깔스럽고, 정갈한 한정식 차림이다.
회,쇠고기 떡갈비,돼지고기,물김치, 북어보푸라기,밥식해, 가자미 조림,두부전,표고찜,홍어삼합, 밀쌈, 등이 한차례 나오고 다시 된장,마늘장아찌와 멸치뽁음,장떡,콩잎장아찌,무장아찌 등 20여 가지 찬이 한상 가득 오른다.

최부자 후손이 경영하는 요석궁의 한정식은 최부자댁 가정식으로  그 뿌리는 조선조 숙종 때 대궐에서 음식 장만을 관리하던 사옹원 참봉이었던 3대조 최국선 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림상에 올려진 음식들은 고급 한정식집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요리지만, 최부잣집에서 대대로 전수되는 음식으로는 멸장·집장·육장·돔장, 사인지 등을 들 수 있다.
상에 오른 '사인지'는 흡사 배추 백김치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맛이 독특하다.  사인지는 소금과 새우젓을 일절 안 써고, 배추에 직접 담근 멸치액젓과 생조기를 넣고 절인 뒤 새우 끓인 물로 담고, 분홍빛이 선명해질 때쯤 손수 만든 실고추로 태깔과 맛을 조절한다고 한다.
그리고 '멸장'은 무를 썰어 하루 동안 절였다가 3일간 물기를 빼고 멸치·간장·물엿을 넣어 6~7시간 졸여 만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