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寫眞)따라 삼천리 안동 제비원의 전설

▲    보물 115호 안동이천동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 .  안동시 이천동 산2

젊은이들은 소주하면 시장 점유율 1위인 진로를 연상하지만 배고팠던 시절엔 제비원 석불상이 상표인 안동소주(제비원소주)가 당시엔 국민 술이었다. 그때 안동 소주의 대명사였던 제비원 석불은 보물 115호로 지정된 안동이천동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이다.
이천동은 안동에서 시오리(6km)쯤  떨어진 영주가는 길목인 5번 국도 오른쪽 오도산 자락에 있다.
전체 높이 12.38m, 너비 7m, 머리부분 높이 2.5m 정도로 워낙 커서 눈여겨보면 지나는 차 안에서도 볼 수 있다.
전에는 들머리길과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아 진입이 여의치 않아 그냥 지나치거나  가변에서 사진을 찍곤 하였는데, 지금은  제비원 일원이 공원화로 정비되어 차량의 진출입과 주차공간이 넓어 마음만 먹으면 둘러볼 수 있다.  연미사가 이전 중건되고 석불상 제단이 만들어지고 제비원의 설화와 전설을 새긴 비문과 쉼터가 마련되어 옛날의 제비원이 아니다.필자도 전에는 이길을 지날 때는 가까이 접근이 여의치 않아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기도하였는데 그때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안동이천동석불상을 가까이서 보면 머리의 뒷부분은 거의 파손되었으나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이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머리와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다.
석불상 뒤에는 석불상 조각가가 제비로 변신한 전설을 지닌 연미사(燕尾寺)와 3층석탑이 있다.  

'안동이천동석불상’ 마을을  속칭 ‘제비원’으로 불린다. 아주 옛날엔 이곳에는 '제비원'이란 원(院이 있었다고한다.
고려시대부터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기 위하여 교통 요지에 있는 절집을 ‘원(院)’으로 지정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영남에서 충청도나 한양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소백산 죽령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던 절이 연미사(燕尾寺)로 관리들의 숙박시설로 활용되면서 ‘제비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제비와 관련된 연미사(燕尾寺)의 전설이 제비원 쉼터에 새겨져 있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신라시대, 고창(古昌)이라고 불린 이 곳에는 여관(당시에는 원이라고 했다)이 하나 있었다. 이 여관에 여덟 살 때 부모를 여의고 심부름을 하는 '연(燕)'이라는 예쁜 처녀가 있었다.
연이는 인물이 예뿐 뿐 아니라, 마음이 고와서 항상 지나는 길손들에게 후대와 적선을 다했다.
방에 불도 따뜻하게 지펴주고, 밥도 후히 담아 주었으며, 빨래까지 빨아주는 연이는 밤늦게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곧바로 자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글을 익히고, 내일은 어떻게 하면 손님들에게 보다 친절하게 도와드릴까 하는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 불심도 대단하여, 새벽에 일어나 청소를 마치고 염불을 해서 지나가는 과객들로 하여금 그 알뜰한 정성과 고운 마음씨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웃 마을 총각들도 모두 남모르게 연이를 사모하는 것이었다.
이 원(院)의 이웃 마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성미여서 거지를 보는 대로 내쫓는 고약한 위인이었다. 이렇게 인심 고약한 김씨집의 총각도 연이에게 장가들고 싶은 마음이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런 부잣집에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란 총각도 이 착한 마음씨를 가진 연이 처녀만은 감히 호락호락 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이 총각이 비명에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이 인사를 받고 한참을 기웃거리며 명부를 뒤적이다가 겨우 이름을 찾아서는 능글맞게 이르는 말이, "아니, 자네는 아직 올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왕 왔으니 인정이나 좀 쓰고 갈 마음이 없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총각이 대답하기를, "지금 전 가진 것이 없는 걸요."하는 것이었다. 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을 생각하더니, 웃으며 총각을 다시 불렀다.
"이봐, 총각! 자네는 세상에 적악(積惡)한 사람이라 다음에는 소로 환생할 것이다. 자네의 창고는 텅 비어 있지만 자네가 사는 건너 마을의 원에 살고 있는 연이는 착한 일을 하여 창고에 많은 재물이 쌓여 있은 즉, 그걸 좀 꾸어 인정을 쓰고 가렀다."

이 말에 그 총각은 많이 놀랐지만, 다시 살아서 돌아간다는 기쁨에 연이의 재물을 꾸어 쓰고는 다시 세상에 돌아왔다.
돌아온 즉시 총각은 연이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연이는 그 재물을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리라 마음 먹었는데, 마침 석불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있어, 도선국사로 하여금 석불을 중심으로 하여 큰 법당을 짓도록 하였는데, 이 공사가 막대한 것이어서 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렀다.
법당을 짓던 마지막 날, 기와를 덮던 와공(瓦工)이 그만 잘못하여 높다란 지붕으로부터 떨어지니, 온 몸뚱이가 마치 기왓장이 깨진 것처럼 산산조각이 되었고, 혼은 제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에 이 절을 '제비사(燕飛寺)' 또는 '연미사(燕尾寺)'라 부르고, 이 곳을 제비원 또는 연비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연이는 그 나이 서른여덟이 되던 해 동짓달 스무 사흗날에 처녀의 몸으로 죽게 되었다. 그 날 저녁에는 온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큰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돌부처가 생겼다고 한다. 돌부처는 연이의 죽은 혼이 변하여 생긴 것이다.
 

제비원은 성주풀이에서 ‘성주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 일러라’라는 사설에 나오듯이 우리나라 성주민속신앙의 정신적인 근원지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는 뜻깊은 장소이다.
제비원에는 '미륵불의 목을 벤 이여송'과 '머리만 조각해 만든 미륵불'이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보물 115호 안동이천동석불상(安東泥川洞石佛像) 전경 .  안동시 이천동 산2


 ▲  공원화된 제비원의 쉼터 2009.10.12 현)

▲  오도산(五圖山) 연미사(燕尾寺) .2009.10.12

안동 시내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영주방면으로 3㎞정도 가면 한티재에 이른다. 이 한티재를 넘어 2㎞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국도변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마애불상을 만나게 된다.
이 불상이 바로 보물 제115호로 지정된 안동이천동석불상이다. 속칭 ‘제비원미륵불’로도 불리는 이 불상 뒤편에 있는 조그만 절이 바로 ‘연미사(燕尾寺)’ 이다.634년(신라 선덕여왕 3) 명덕(明德)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명덕은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바위에 불상을 새겨 모시고 사찰을 세웠다. 그 뒤 불상을 덮은 지붕이 제비와 비슷하여 연자루(燕子樓)라 하였고, 승려가 거주하는 요사채(寮舍)는 제비꼬리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연미사(燕尾舍)라고 이름지었으며, 법당은 제비부리에 해당한다고 하여 연구사(燕尾寺)라 불렀다.

고려시대 재난으로 불상머리가 굴러 떨어져 파괴 되자 다시 복원하고 전각 중수와 삼층 석탑을 조성하였는데, 이때부터 산 이름이 오도산(五圖山)으로 널리 알려졌다.그러나 조선 중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연구사는 폐사되기에 이르고 다만 석불만 남아 있었다.
사찰의 이름 마저도 실전(失傳)되어 ‘연비원불사’로만 전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봉정사의 신도 모임으로 등촉계의 일원인 ‘거사림(居士林)’에서 사찰의 창건을 발의하여, 1934년 연미사 (燕尾舍) 유지(遺址)에 사찰을 새롭게 조성하고 구전(口傳)에 따라 연미사(燕尾寺)로 하였다.

2009.10.12  글.사진 정해유포토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