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가가와현 구룡포 이민 3세들의 망향가-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홍보전시관

포항시가  일본인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출간한  '구룡포읍에 살았다(조중의. 권선희 공저)'라는 책에는 일제강점기 때의 구룡포의 근대사가 빛바랜 사진과 이야기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100년전(1900년초) 유토피아를 찾아 구룡포로 집단 이주한 사람들은  일본 가가와현 오다어 어촌의 어민들이였다.
 오다어 어촌은 논도 밭도 전무한 궁핍한 어촌으로 경제력도 어자원도 부족해 열악한 환경에서 겨우 고기를 잡아 연명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엔  70~80호의 어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물고기를 찾아 오다오다 구룡포 근해가지 오게된 오다어 사람들은 이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유토피아를 찾아 온 것이다.
1900년대 초 당시 구룡포 근해는 말그대로 '고기반,물반'이었다고 한다.
오다어 사람들은 친지들까지 불러와 지금의 일본인 가옥거리를 이루게  된다.
 1919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인 이주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 어업인뿐만 아니라 상공인도 이주하여 회사를 세우고 방파제도 건설하게 되었다.
구룡포는 일본인들의 유토피아로 본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구룡포의 경제력을 과시하면서 전성기를 누리다가
1945년 패전으로 해방이 되면서 그들이 구룡포땅에서 반세기 동안 일구어 놓은 집도,회사도 다방도,이발관도,여관도 그대로 두고 돌팔매질을 맞으면서 빈손으로 허겁지겁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인들의 속박에서 벗어 난 구룡포 사람들은 신사도, 일제 공덕비도 지워 버렸다. 그래도 뿌리까지 뽑은 것이 아니라 일제의 잔상을 시멘트 등으로 덧칠하여 해방 64년이 흘러도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 가옥 거리'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공원을 꾸미고 계단에는 촘촘히 비석을 세우고 공로자의 이름을 비석에 새겨 놓았다.
해방이 되면서 구룡포 사람들은 비석에 새긴 일인들의 이름자를 시멘트로 지우고 거꾸로 돌려 구룡포 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 지금에 이른다.

계단위 공원에는 당시 선원들의 무사고를 빌던 용왕당과 구룡포 방파제를 건설하는 데에 앞장선 '도가와 야스브로'의 공덕비가 지금도 구룡포항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비문은 시멘트로 덧칠되어 지워져 역사의 흔적을 대변하여주고,  당시에 지어진 신사는 자취가 없다.

'도가와 야사브'의 공덕비는 해방 3년전인 1942년에 세워졌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민족을 초월하여 구룡포 발전에 획을 그은 인물로 알고보면 송덕비가 아깝지 않은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으로 구룡포에 정착한 수산업자이나 구룡포발전에 끼친 족적은  매우 컸다.
구룡포 포항간 도로 개설(1913년), 구룡포어업조합 설립(1922년), 구룡포 방파제 축조(1926년), 구룡포 대보간 도로 개설(1934년), 구룡포읍 승격(1942년) 등 일련의 구룡포의 개발과 발전 과정에 그는 이방인을 초월한 큰 업적을 이루었다.

'도가와 야사브로'는 구룡포어업조합장으로 어업인을 위한 어법 지도와 어법개선, 공동판매, 어가(魚價)의 안정과 공정한 처리로 구룡포 어업인들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적산가옥,공장,선박을  때려부수고 불태웠지만, 구룡포 사람들은 '도가와 야사브'등 일본인들이 구룡포 발전과 구룡포 어업인을 위해 애쓴 점을 느꼈기에 아이들이 일본인에 돌을 던질 때도 '그러면 안된다고' 말렸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공덕비를 찾은 그의 손녀는  시멘트로 덮여진 비문을 보면서 구룡포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때 아이들이 자기에게 돌을 던질 때 말리던 아이의 어머니가 그립다고 했다.
해방 64년이 흐른 지금까지 구룡포 뒷골목엔 40여채의 일본인가옥이 건재하고 비록 비문이 시멘트로 덮여졌지만 일본인의 공덕비가  그 자리에 온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실감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당시 구룡포에서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내고 쫓겨 간 이민 3세대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진하게 베긴 구룡포가 그리워 '구룡포회'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며 해마다 그들의 고향 구룡포를 찾아 망향가(望鄕歌)를 부른단다.



▲ 100년전(1900년초) 유토피아를 찾아 구룡포로 집단 이주한 사람들은  일본 가가와현 오다어 어민들이었다.
 오다어 어촌은 논도 밭도 전무한 궁핍한 어촌으로 경제력도 어자원도 부족해 열악한 환경에서 겨우 고기를 잡아 연명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엔  70~80호의 어민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물고기를 찾아 오다오다 구룡포 근해가지 오게된 오다어 사람들은 이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유토피아를 찾아 온 것이다. 1900년대 초 당시 구룡포 근해는 말그대로 '고기반,물반'이었다고 한다.오다어 사람들은 친지들까지 불러와 지금의 일본인 가옥거리를 이루게 되었다.1919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인 이주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 어업인뿐만 아니라 상공인도 이주하여 회사를 세우고 방파제도 건설하게 되었다.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 1900년 초 일본 어민이 이주하면서 생겨난 구룡포 일본인 가옥 거리로 그들이 쫒겨가고 64년이 흘렀지만 좀 모양은 바뀌었지만 당시의 사무실,여관,요리집,이발관 등 40여 채의 목재 적산가옥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당시 이곳에서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내고 해방으로 쫒겨간 이민 3세대들이 지난날의 추억과 낭만이 진하게 쌓인 구룡포가 그리워 '구룡포회'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며 해마다 그들의 고향 구룡포를 찾아 망향가(望鄕歌)를 부르는 거리이다.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홍보 전시관 마당에 세원진 당시 '경상북도 구룡포 시가지' 지도로 이곳을 찾은 이민 3세들이 유년시절 자기가 살았던 곳을 찾아보면서 추억에 눈물을 짓는 곳이다.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당시 다이토여관(전화 16번) 작은 흑배사진과 지금의 다이토여관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당시 동양병이 이발소(주인 마츠모로유라로)의 작은 흑백사진과 지금도 그 자리엔 그 모습대로 이용소가 영업중이다.

 




▲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 당시 '하리야마 식당과  야마구치마사유키 상점(전화 23번)' 작은 흑배사진과 지금의 모습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뒤산에 조성된 공원에 구룡포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공간에 구룡포 발전에 공이 큰 인물의 공덕비가 비문이
시멘트로 덮여진체 남아있다.
일본인 '도가와 야사브'의 공덕비로  해방 3년전인 1942년에 세워졌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민족을 초월하여 구룡포 발전에 획을 그은 인물로 알고보면 송덕비가 아깝지 않은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으로 구룡포에 정착한 수산업자이나 구룡포발전에 끼친 공로는 매우 컸다.
구룡포 포항간 도로 개설(1913년), 구룡포어업조합 설립(1922년), 구룡포 방파제 축조(1926년), 구룡포 대보간 도로 개설(1934년), 구룡포읍 승격(1942년) 등 일련의 구룡포의 개발과 발전 과정에 그는 이방인을 초월한 큰 업적을 이루었다.

'도가와 야사브로'는 구룡포어업조합장으로 어업인을 위한 어법 지도와 어법개선, 공동판매, 어가(魚價)의 안정과 공정한 처리로 구룡포 어업인들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해방이 되면서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적산가옥,공장,선박을  때려부수고 불태웠지만, 구룡포 사람들은 '도가와 야사브'등 일본인들이 구룡포 발전과 구룡포 어업인을 위해 애쓴 점을 느꼈기에 아이들이 일본인에 돌을 던질 때도 '그러면 안된다고' 말렸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공덕비를 찾은 그의 손녀는  시멘트로 덮여진 비문을 보면서 구룡포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 때 아이들이 자기에게 돌을 던질 때 말리던 아이의 어머니가 그립다고 했다.
해방 64년이 흐른 지금까지 구룡포 뒷골목엔 40여채의 일본인가옥이 건재하고 비록 비문이 시멘트로 덮여졌지만 일본인의 공덕비가  그 자리에 온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실감난다.
만약에 '도가와 야사브'가 수산업자로 돈만 착취했다면 해방 그날 그의 송덕비는 박살나고 그의 집은 불태워 ......


현재의 구룡포항  

 2009.11.23  사진.글 정해유 이미지 편집 디자인 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