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암의 가을

▲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리 소재  사인암.  역동선생이 정4품인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상에 힘쓴곳이라 현재도 마을 이름이 사인암리이다.
이곳 사인암에는

    "한손에 막대 집고 또 한손에 가시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렸더니 白髮이 제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고 노래한 역동 선생의 탄로가(嘆老歌 )가 사인암벽에 새겨져 전한다.

역동우탁(易東禹倬)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인 동시에 시조문학(時調文學)의 효시(嚆矢)로 탄로가(嘆老歌)를 남긴 분이다.

'고려사'에는 다음같은 우탁설화(禹倬說話)가 전하여진다.
어릴 적부터 성격이 곧아서 자기 주장을 분명히 폈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당사자가 어른일지라도 꼭 짚고 넘어가는 올곧음이 있었다.
어린 소년의 학문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고 거기서 우러난 행동 거지가 어떻게나 밝았던지 이미 학자의 학식과 군자의 품성을 갖췄다고 하여과거에나 합격해야 주어지는 진사라는 벼슬 칭호를
15세 난 어린 소년에게 붙여 주었다.처음에 그는 벼슬에는 별로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1290년(충렬왕 16) 그의 나이 27세로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처음 벼슬로 사록이라는 관직을 받고 지금의 경북 영덕군에 있던 영해 라는곳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부임해 보니 이곳에 팔령이라고 이름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어 주민들이 이 영험을 믿고 팔령신을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팔령신이란 이름 그대로 여덟의 방울신을 일컫는데 이들에게 재물을 바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화를 입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얽매여 힘겹게 재물 을 바쳐야 하는 주민들의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학에서는 민간신앙인 이러한 미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철저한 유학자인 우탁이 이를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는 이 팔령신을 타파하는 데 아주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 전한다. 그 하나가 여덟개의 방울을 만들어 그것을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림으로써 팔령신을 현지에서 구전되는 것으로, 여덟신 중 일곱을 없애고 나머지 하나마저 없애려 하자 살려 달라고 싹싹 비는데 보아하니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호호한 백발의 가련한 할미라 이를 살려 주었더니 이 신이 지금의 당고개 서낭이 됐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우탁에 관한 인물전설이 '우탁설화'라고 하는 이름으로 만들어져 전해 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철저한 유학자로서 폐해가 컷던 미신 타파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우탁은 주역의 이치에 능한 사람이었다.

주역은 일명 「역경」이라 하는데 약칭으로 그냥 '역'이라고도 한다. 역'은 괘를 따져 의미를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에 능하면 길흉을 점칠 수 있다.
주역의 이치를 깊이 공부한 우탁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역학자였으며, 또 이를 넘어서 도술까지 부렸다고 한다.
어느 여름날 개구리 울음소리가 하도 시끄러워 우탁이
 "네 이놈들 계속 그렇게 기승을 부리면 멸종을 시킬 것이니라."
하고  글을 써서 개구리들에게보내니 동헌으로 개구리들이 떼로 몰려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 했다는 이야기와   호랑이가 사람과 가축에 해를 끼치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런방법을 써서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013.10.12 정해유포토디지인연구실

 

 ▲   단양시 대강면 사인암리 소재  사인암.  역동선생이 정4품인 사인벼슬에 있을때 고향 단양 사인암에서 산수를 즐기면서 후학양성에 힘쓴 사인암 전경

 

 ▲  가을이 농익은 사인암